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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첫 유혈 민주화운동, 민주주의 근간 세우다 - 3·15의거 60주년 - 4·19혁명 도화선 된 3·15의거 / 장기집권야욕 국민 저항에 ‘무릎’ / 현대사 최초 민주·민족운동 60주년 / 역사성 재조명하는 다양한 사업추진
  • 기사등록 2020-03-04 18:2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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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3·15의거가 일어난 지 60주년이 되는 해다. 창원시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물꼬를 틔운 3·15의거 60주년을 맞아 3·15의거 정신을 계승·발전시키며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는 다양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3·15의거 배경과 시위 전개과정, 의의를 되짚어본다.
△자유당 정권 장기집권 야욕으로 벌인 부정선거로 3·15의거 발생 =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48년 초대 대통령부터 1960년 당시 3대째 대통령을 지내고 있었다. 그는 12년 동안 대통령을 했음에도 장기집권체제를 연장하고, 승계권을 가진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는 장기집권야욕을 노골화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를 앞두고 준비과정에서부터 공권력을 동원해 노골적인 부정행위를 저질렀고, 이에 2월 28일 대구에서 학생들의 첫 시위가 터졌다.
3월 15일 선거 당일, 자유당 정권은 사전투표, 3인조·9인조 공개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 온갖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이런 부정행위 결과로 개표 과정에서 부통령 이기붕의 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가 나오자, 이를 79%로 하향 조정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공공연한 부정행위를 목격한 마산시민들은 “협잡선거 물리쳐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하기 시작했다.
△첫 유혈진압→사상자 수십명→김주열 학생 시신 발견→전국 시위 확산→4·19혁명 = 1960년 3월 15일 자유당 정권의 투표 부정에 반발한 학생과 시민들이 시위에 나섰으며, 성난 시위대는 오후 들어 더 늘어났다. 오후 6시 30분 마산 무학초등학교에서 도립마산병원에 이르는 연도에 수천 명의 시위 군중이 모여 ‘부정선거’를 규탄했다. 오후 8시경 마산시청, 남성동파출소, 북마산 파출소 앞 시위 군중을 향해 경찰은 최루탄과 총기로 무차별 발포하며 맞섰다.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수백 명이 체포 구금됐다. 시민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여기에다 4월 11일, 27일 동안 실종됐던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최루탄이 얼굴에 박힌 처참한 모습이었다. 이에 분노한 마산시민의 2차 시위가 남성동, 오동동, 신마산 등 시내 일원으로 전개됐다. 마산 시내 8개 남녀고교생 3000여 명도 울분을 삼키며 들고 있어났다. 시민 수만 명도 합류했다.
자유와 정의를 향한 불길은 전국으로 번져갔다. 마침내 4월 19일, 전국의 시민과 학생은 총 궐기했다. 4·19혁명이 발생한 것이다. 당황한 이승만 정부가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지만, 시위군중은 더욱 완강하게 투쟁했다. 전국적으로 수백 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다.
△민초의 저항에 이승만 대통령 하야 선언…2010년 3·15의거 국가기념일 제정 = 1960년 4월 26일, 결국 자유당 독재정권은 민중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하와이로 망명했으며, 자유당 정권도 종말을 고했다. 자유·민주·정의를 열망한 민중이 마침내 승리했다. 민초의 힘과 용기를 보여준 자랑스러운 역사의 한 페이지였다.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총칼 앞에서도 당당히 맞섰던 마산의 시민정신은 오늘날 민주화를 뿌리내린 자양분으로 길이 칭송받는다. 대한민국 현대사에 있어 4·19혁명과 부마민주항쟁, 6월 항쟁, 5·18 민주 항쟁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 역사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는 역사적 평가다. 3·15의거는 지난 2010년 국가기념일로 제정 됐다.
박인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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